갓수의 지식창고

 

 

  일본을 여행간다고 한다면 바로 떠오르는 건, 도쿄, 교토, 오사카, 후쿠오카, 나고야, 삿포로 정도가 떠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지식, 아니 저 도시가 어디에 박혀있는지 등의 대략적인 지식조차 없기 때문에 정말 막연하죠.

  이에 일본의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간다면 지식습득의 과정이 재밌지 않을까 싶어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인 전국시대, 

그 중에서도 가장 역동적이었던 1550-1590 시기는 당시 사람들이야 지옥이었겠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정말 재밌는 소재입니다.

재밌게 접근할 수 있는 소재이니만큼 가볍게 여행을 떠나는 분들께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지명, 인명은 당시 상황 무시하고 전부 현재를 기준으로 하겠습니다.)

 

 

  지나가다 한 번씩은 들어봤을법한 이름인 오다 노부나가

  임진왜란의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

  최후의 승리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크게는 이 세 사람이 전국시대에서의 천하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다 노부나가는 지도의 중앙에 있는 나고야 부근에 가문이 위치하고 있었는데, 딱 봐도 평야지역인 게 군대만들기 좋아보이죠?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가 가문의 암투에서 승리자가 되어 가문을 장악했을 무렵에는 그렇게 큰 세력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도쿄 서쪽의 후지산 서쪽에 위치한 시즈오카에 근거지를 갖고 있는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더 큰 세력이었고,

  나고야 남쪽에 위치한 오카자키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을 지배하에 넣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인질로 잡아 장수로 키운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 교토로 상략을 하게 되는데,

  시즈오카와 교토 사이에 나고야가 있으니 오다 노부나가와의 충돌은 자명한 사실이겠죠?

 

  두 세력의 싸움에서 오다의 병력은 확연하게 열세였기에 패배의 기운이 만연했습니다.

  하지만, 언덕에 진지를 구축한 후, 쉬고 있던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정면에서 돌진하여 목을 따고 승리를 거두는 이변을 연출하게 됩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는 않죠. 언덕에 진지를 잡고 있는데 밑에서 돌진한 열세인 병력이 어떻게 적장의 목을... 이에 관해서는 일본 역사학자들이 여러가지 의견을 내고는 있지만 일본 역사책이 조선왕조실록마냥 신빙성이 있는 게 아니라서 확실한 건 알 수 없습니다.)

 

  이마가와 가문은 가문의 중심이었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죽고 난 후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마가와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배했을 때, 원래 가문의 본거지인 오카자키로 어영부영 돌아간 후, 오다와 결혼동맹을 맺습니다.

 

  어쨌든 오다 노부나가의 입장에서는 남쪽 큰 세력의 위협을 물리쳤으니 

  나고야 부근의 넓은 지역들을 장악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평민 출신으로 오다 밑에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두각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렇게 오다 노부나가가 나고야 지방을 전부 장악하고 나니 인재들도 넘치고, 식량도 풍부한데다, 합리적인 정책의 수립으로 

  이제는 그가 전국에서 손에 꼽히는 세력이 되었습니다.

 

  자, 이제는 오다 노부나가가 상략을 위해 교토로 진출하게 됩니다.

 

  당시 교토는 덴노가 거주하는 곳이자, 역사, 문화의 중심지였기에 그 주변이 빽뺵하게 개발이 되어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랬기에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로 진출하는 길목에는 많은 가문, 귀족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들 입장에서는 촌뜨기에다 과격하리만큼 파격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던 오다에게 당연히 반발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다의 세력이 막강하였기에 그들은 노부나가 포위망이라는 걸 구축하게 됩니다.

  나가하마의 아자이, 후쿠이의 아사쿠라 가문이 일차로 저지하기 위해 나섰고,

  당시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중심으로 교토 부근의 가문, 귀족들과 혼간지, 엔랴쿠지 등의 종교세력까지 합세해 

  오다는 서쪽의 전선에 신경을 써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 나고야 우측에 위치한 산지를 장악하고 있던 야마나시의 다케다 신겐이 남하해 시즈오카를 장악하고

  나고야 남쪽에 위치한 오카자키, 하마마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맞붙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회전에서 도쿠가와 군을 완전 박살을 내버리면서 후세에 유명세를 떨칠 수 있는 업적?을 만들어 냅니다.

  물론 당시 세력상 다케다 신겐이 우세하였지만 도쿠가와가 똥을 지리면서 도망을 가게 할 정도였으니 실력도 좋았겠죠.

  (도쿠가와는 이 전투에서 진 후 실제로 똥을 살짝 지렸고, 반성하기 위해 패배 직후, 인상 찌푸리고 고뇌하는 모습을 그리도록 했고,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세를 탄 신겐은 계속 진군했고, 서쪽의 전선 때문에 오다의 원군이 오는 건 불가능했기에 도쿠가와를 정복하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수명이 다해 죽게 되었고,

  리더를 잃은 신겐군이 퇴각하여 오다와 도쿠가와에게는 큰 행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자이, 아사쿠라를 격파한 오다 노부나가는 마침내 교토와 그 부근을 전부 장악하였고,

  다케다 신겐 북쪽의 조에쓰를 근거지로 정의의 수호자 노릇을 하고 다니던 우에스기 겐신에게 당하는가 싶었는데

  그가 똥을 싸다 급사해준 덕분에 명실상부한 일본의 천하인이 되었습니다.

 

  오다는 촌놈이라고 무시당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비와호 남쪽에 인접한 아즈치에 거대하고 호화로운 성을 쌓아 자신을 과시하였고,

(비와호는 교토 동쪽에 있는 유명한 호수로, 지도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합니다. 폭 30km 정도.)

  교토 서쪽 멀리 위치한 쥬고쿠의(히로시마 동쪽) 모리가문 격파를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파견,

  오사카 서쪽 바다 건너 시고쿠의 쵸소카베가문, 조에쓰의 우에스기 가문을 정벌하기 위해 다른 장수들을 파견하게 됩니다.

 

  전력상의 우위는 확실했고,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서쪽의 전선을 지원하기 위해 아즈치에서 교토의 혼노지로 거점을 옮겼고,

  귀족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노부나가가 교토에서 입지를 쌓기 위해 영입한 명문 귀족 출신인 아케치 미츠히데가

  병력도 얼마 없던 노부나가의 뒤통수를 제대로 때려 그를 제거하게 됩니다.

 

  이 아케치 미츠히데가 오다 노부나가를 친 원인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오다가 막 대해서 쌓인 불만이 폭발했다로 보는 게 주류입니다.

 

  이렇게 오다가 허망하게 죽고 아케치 미츠히데가 잠시 천하를 갖게 되지만

  쥬고쿠 정벌을 위해 서쪽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케치가 수습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 빨리 회군, 170km를 일주일만에 주파해 회전을 걸었고,

  그대로 격파해 이제 천하의 패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가까워졌습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 전부가 히데요시를 지지한 건 당연히 아니었고,

  오다의 아들들까지 뒤엉켜 한바탕 싸움을 하게되었는데, 여기서 역량을 발휘해 승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도쿠가와와의 싸움에서는 이기지 못하고 철수한 후, 결혼동맹의 형태로 밑으로 들어오게 했고,

  도쿠가와의 근거지였던 오카자키, 하마마쓰, 시즈오카 등에 걸친 영지를 회수한 후,

  한 때 잘나갔지만, 후계자를 잘못 둬 쇠퇴하던 와중에 도요토미에게 까불던 호죠가문을 격파하고, 

  그 부근으로 영지를 이동시키는데, 그곳이 바로 도쿄입니다.

  

  가문 대대로 충성을 바쳤던 가신들과 정예병이 주축이었던 도쿠가와 입장에서는 방어는 할 수 있으나 공격은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고,

  도요토미가 당시 최대 규모의 거성인 오사카 성을 쌓는 등 전성기를 누리며 차례로 쥬고쿠, 시고쿠, 큐슈 정벌에 성공해 세력을 넓혔기 때문에, 

  계속 싸우는 것 보다는 현명한 선택이었죠.

  그리고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도쿄부근이 엄청나게 넓은 평야지역입니다.

 

  도요토미 입장에서는 교토, 나고야와 도쿄 사이엔 후지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신경 쓰이는 놈을

  안 보이는 곳으로 보내버린다는 의미도 있고, 당시 도쿄의 평야지대는 제대로 개발이 되어 있지 않았기에 견제도 되었습니다.

  거기다 원래 지역의 기반을 버리고 새 기반을 쌓아야 한다는 점에서 도쿠가와 측 가신들은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도에서 보듯 도쿄 부근의 평야지대는 정말 말이 안 될 정도로 넓기에 도쿠가와는 그 잠재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인생 최대 삽질인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 때, 도쿠가와는 도쿄부근 개발 및 수습을 해야 된다고 여우같이 빠졌고, 전력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임진왜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도요토미는 큰 타격을 입어 기세가 죽었는데,

  어린 아들 하나만을 남기고 병이 들어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힘을 비축하던 도쿠가와는 세력을 야금야금 확장시키고, 정치적 역량을 발휘해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일으켰고, 여기서 승리를 거두어 도요토미 세력을 와해시킨 후, 

  2차례에 걸친 오사카 성 정벌전으로 성을 함락시켜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고는 천하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 후, 도쿠가와는 도쿄에 에도 막부를 열며 전국시대를 마무리 지었고,

  아들에게 후사를 맡기고는 이마가와에게 인질로 잡혀 성장했던 곳인 시즈오카로 돌아가 편안히 여생을 마치게 됩니다.

 

(인질이라고는 하지만 이마가와는 영재교육에 조카를 아내로 주는 등 상당히 잘 대해줬기 때문에 좋은 기억이 많았을 것입니다.)

  

  

 

 

  쓰다보니 내용이 길어졌는데, 3줄로 요약하자면,

 

  오다 노부나가가 역경을 헤치며 노른자 땅을 비롯한 영토를 얻었지만 뒤통수 맞아 죽었고,

  히데요시가 그걸 낼름 받아 통일을 시켰지만,

  정치 9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관광을 가면 시즈오카, 하마마쓰, 오카자키에선 도쿠가와,

  오사카 쪽은 히데요시, 나고야 쪽은 노부나가 쪽 관광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전국시대에 중심이 되었던 대도시는 교토, 오사카, 나고야, 도쿄 정도지만, 이를 기점으로 일본을 알아나간다면

  더욱 수월하게 지식체계를 갖출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본 여행 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 여행 기초 상식  (0) 2013.11.29